어떠한 생각이든 행이든 자기가 중심을 잡고 잘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어찌 둘이겠는가.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니 
어떠한 문제든지 
마음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다 되놔라.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항상 한자리를 하면서도 또 한자리를 한 것 같습니다. 우주의 섭리와 더불어 우리 생활이 같이 돌아가면서도 너 나가 있듯이, 너 나가 있으면서도 한자리 하고, 한자리를 하면서도 한자리가 아니고 한자리가 아니면서도 한자리를 할 수 있는 깊은 뜻, 그 깊은 뜻에 의해서 우리는 움죽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해 드리는 것은 말로 그냥 떨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법이 돼서 여러분한테 이익이 가고 여러분 생활에 지침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문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책을 보고 어떠한 이론이나 가지고 생활에 지침이 없게 한다면, 내 행동에 지침이 없고 내 몸에 지침이 없고 내 가정에 어떠한 보람이 없다면, 삶의 뜻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위로나 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게 아니라 또는 잠시 잠깐 위로를 받기 위해서 여기 오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피땀을 흘려 가면서 단돈 얼마라도 벌어서 살 양으로 쫓기고 쫓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도 딱한 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러는 반면에 여러분이 헛된 꿈을 꾸고 헛된 말을 듣고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항상 말씀을 드렸지마는 또 한번 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여러분이 공부하는 자세는 여러 가지가지가 있습니다. 허나 제가 길을 인도하는 방식은 세 가지가 포함돼서 한데 공존하고 있는 그 자체를 일심(一心)으로 둔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언제나 광력이나 자력이나 전력이 그대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지수화풍에 의해서 그대로 거기 바탕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오신통이 항상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의 책정하는 마음에, 즉 누진통에 그대로 근본적인 구슬이 그냥 굴러가고 있고 회전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 것을 산란하게 두는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마는 잠재의식 카세트에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잠겨 있던 그것이 솔솔 각본대로 풀려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고 그냥 ‘아이구, 무슨 팔자가 이래서, 무슨 운명이 이래서 이렇게 다가오는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이러지마는 가혹하다고 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정해 놓은 겁니다. 정해 놓은 거를 그대로, 한 것만치 거기서 각본대로 나온다고 제가 항상 말을 했죠. 거기다가 되놓으면 그 테이프에 앞서 녹음된 거는 없어진다고요. 여러분한테 방편을 준다 하더라도 진실되게 방편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방편이자 이건 현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놓는 데에 어떠한 망상과 어떠한 문제, 공부가 잘되는지 못되는지를 가늠을 못 하고 있노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들여놓고 내놓고 하는 그 자체가 들여놓는 데도 한 치의 틈이 나질 않고 내놓는 데도 한 치의 틈이 벌어지지가 않습니다. 오직 거기서 나고 거기서 드는 겁니다. 그러니 어떠한 생각을 했든지, 어떠한 행을 했든지, 어떠한 말을 했든지 자기가 중심을 잡아서 잘해 나가야만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심을 잡아서 잘해 갈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서 소나 말이나 돼지 같은 것은 세 가지의, 즉 사람이 지각이나 청각이나 감각 등 다섯 가지 여섯 가지를 충분히 가졌다면 말이나 돼지나 소들은 세 가지 종류밖에 안 가졌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그 소를 보는 순간에 소는 바로 내 마음에 의해서 같이 둘이 아닐 때에 비로소 인간의 충족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소뿐만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고기가 고기로 보이는 게 아니라 소는 내 살이 되고, 바로 그 소의 마음은 내 마음이 되고, 그 생명은 내 생명이 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요리가 돼서, 즉 말하자면 무명만 쳤을 뿐 소를 살린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운 방법으로 여러분한테 항상 이런 얘기를 해 드렸습니다. 모든 것에 걸리지 말고 하되,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깐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이 해 나가는 모든 각도가 그르고 좋고 나쁘고 해롭고 한 것을,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해서 잘 처리를 하시라는 얘깁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을 보러 나갔습니다.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이러다 보니까 참 마음은 착했지마는 그 도리를, 물론 그 도리를 몰랐던 것은 듣지도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 법을 몰랐던 거죠. 그런데 가다가 보니깐 논두렁 풀 속에 큰 구렁이가 얼기얼기 있으면서 자식을 낳아 가지고선 온통 한 무더기가 있더랍니다. 그거를 그냥그냥 두고 가도 좋으련만 그걸 왜 삽자루로 그냥 붕덩붕덩 끊어 버리고 갔겠습니까. 

그것이 한 가정을 다 파괴를 시켜 버린 거나 똑같은 얘깁니다. 작고 클 뿐이지 또 모습이 다를 뿐이지 마음이야 어찌 사람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그 인연으로 인해서, 인연줄에 의해서 병신 손주들을 다섯이나 낳았습니다. 작은아들이 낳아도 병신이 되고 큰아들이 낳아도 병신이 되고, 이거는 자식들이 온전하게 되질 않아.

내가 만나는 여러분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비밀로 놔두지마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게 한 가정에 하나만 됐어도 좀 덜하겠습니다. 한 가정에 셋씩이나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피 토하고 죽을 일이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죽일 수도 없고, 이런 문제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볼 때에 벌써 ‘그것은 어떤 점에서 7대째 내려오는구나’ 하는 거를 알면서도 말을 못 합니다. 왜 못 하느냐? 여러분한테 그 말을 하게 되면 이게 쇼크가 되고 또 그게 잠재의식에 감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머리에서 지워 주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그런 업덩어리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게 과거로부터 쫓아 나온 건데, 과거의 인연줄로 인해서 쫓아 나온 건데, 쫓아 나온 그 자체를 우리가 다시금 거기다 놓는다면 그것이 묵살되지 않느냐고 몇 번이고 말해 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죄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반야심경에 있듯이,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과 마음이 어찌 둘이겠느냐.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니 어떠한 문제든지 마음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다 되놔라.’ 이런 뜻입니다. 둘이 아니다. 몸이 일할 때는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것이요, 또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부(父)와 자(子)는 어디 있는가?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뭐라고 표현을 해야만 되는가. 부는 부처라고 한다면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와 자가, 생각할 때는 부는 자가 돼 주고 가만히 있을 때는 자는 부가 돼 줍니다. 그러니깐 둘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 하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하는 자체가, 짤막하게 우리 몸으로 비유해서 세운다 하더라도, 몸이 돌아가는 거는 마음으로 인해서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는 건 생명으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부와 자, 승보인 몸뚱이, 부와 자가 움죽거리는 바람에 이 몸뚱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움죽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하나가 없어도 아니 되죠. 우리가 마음 내는 분별이 없어도 목석일 것이고 우리 몸뚱이가 없어도 남 보기에 보이지 않고 내가 할 수 없으니 그건 무효고, 생명이 없어도 아니 돼.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삼위일체로 구성돼서 회전을 하니까, 주인공! 어떤 거를 세워서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주인공이라고 한 거고, ‘공(空)이다’, ‘없다’라고 한 겁니다. 반야심경에도 역시 꽉 차서 돌아가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했지 없어서 ‘공이다’라고 허공을 가지고 그냥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에 여러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 까닭에 공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숨쉬기를 ‘만든다’ 하면 벌써 그건 아닙니다. 한도가 있는 것은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우린 자연적으로 생명이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공기가 들고 나서 우리는 호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게 뭐,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고 얼마나 무서운 도리면서도 자비한 도리인지 모를 겁니다. 요만큼 하나 샐 틈이 없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를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마는 우리가 마음 씀씀이를 쓰는 데에 전체가,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좋은 거든지 나쁜 거든지 거기서 다 나옵니다. 틈이 없어요.

요거를 하나 얘기를 할까요. 제가 예전에 산중에 들어가서 돌아다닐 때에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진리는 목적지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인가 하면 종점이고 종점인가 하면 시발점이 돼서 도저히 그것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대로 그냥 다리를 떼어 놓은 것이죠. 

떼어 놓다 보니깐 어느 산중에 근근 들어갔는데 때에 따라서는 참, 장난이라고 할까요? 장난이 아니라 공부라고 할까.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다가 어느 절이나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사람 같지 않으니깐 내쫓았습니다. 내쫓아도 안 나가면 그냥 떠다 박질러서 그냥 내쫓죠.

그러면 그 사람이 원망이 되는 게 아니라 웃음이 나는 겁니다. 왜 웃음이 나느냐? 글쎄, 왜 일부러 가서 거기서 자고 싶지도 않은 거를, 이 산 울 밑에 어디 잘 데가 없어서 거기 가서 일부러 잔다고 해 가지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발길에 차이고 떠다 박질러지고 넘어져서 피가 나고 그러느냐 말이에요. 

그걸 가만히, 엎드려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깐 어떤 생각이 났느냐 하면은 야, 저 사람에게 괜히 내가 죄를 짓게 하고…, 나는 나대로 우습기만 한 겁니다. 그래, 어디 잘 데가 없어서 저 천막이나 쳐 놓고 있는 데 가서 자자는 거냐 이겁니다, 응? 천막은 본래 쳐져 있고 본래 탁 터져 있는데, 그건 한생각에 달려 있는 건데. 아, 그거 얼마나 편안해. 세금 달라는 소리도 없고, 와서 자란 말 자지 말란 말도 할 거 없고 그런데, 풀 속을 헤치고선 거기 가서 턱 드러누우면 만사가 편안한 것을, 글쎄, 그게 무슨 짓이냐 말이야. 

그리고 또 뭘 얻어먹자고 들어가는 거야, 또. 얻어먹긴 뭘 얻어먹어? 아, 맨 먹을 건데. 이 세상에 먹을 게 없는 데가 어딨어? 모든 풀이 다 먹을 거라. 그런데 먹을 거를 그렇게 찾고 다니면 먹을 게 안 나와. 먹을 게 보이지도 않고, 또. 먹을 걸 찾지 않고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해골이 있고 뼈다귀 있는 데로 가겠다 이런다면 아예 먹을 게 나오죠. 해골들이 다 쫓아다니면서 해 줘. 그러나 내가 죽지 않겠다고 살겠다고 먹을 걸 짊어지고 다니거나, 자겠다고 어디 가서 구걸을 하거나, 노비를 얻거나 이런다면 절대 그것은 생기질 않아. 그리고 저승엘 들어갈 수도 없고. 산 몸으로 어떻게 저승엘 들어갑니까?  산 몸을 가지고 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거야. 마음이 죽어야 들어가지. 

그래서 야단을 맞고 싱그레 웃고선, 본래는 그러한 마음을 굳이 가지고 갔던 게 아니기 때문에 ‘아하, 내가 예전에 누구한테 듣기에 이것이 바로 탁마요, 이것이 바로 탁발이요, 이것이 바로 선법의 도리를,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하고선, 스스로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참나가 고마워서 말입니다, 싱그레 웃고서 ‘야, 이렇게 다친 이 무르팍은 금방 낫겠지.’ 하고선 그냥 갑니다. 산으로 올라갈 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그전에도 그런 말을 벌써 몇 번째 했으나 되풀이하죠.

큰 묘지에다가 등을 기대고 자려고 떡 앉았으니까 아, 거기서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나와서 신발 한 짝 훔치러 왔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묘지는 큰 우주의 근본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묘지, 묘산은. 이걸 뜻으로 배워야지 어떠한 물질로다가 배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엉뚱하게 그냥 물질로 가 버리고 말아 버려요. 뜻으로 아셔야 돼요. 그래서 신발 한 짝은, 이승에 발 한 짝 저승에 발 한 짝을 디뎌야 왕래를 하죠. 

그런데 그걸 처음에 듣기에는 그냥 별안간 각중에 그렇게 일어나니까 내가 너무나 놀라서 막 뛰었습니다. 그냥 막 뒤로 가는데, 그믐밤에 뒤로 가면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때도 어린 마음이니깐 그렇겠죠. 그래서 가다가 주저앉아 궁뎅이를 찍고 보니까는 그냥 얼마나 아프던지 눈에서 불이 번쩍 나면서, 번쩍 나는 순간에 뭔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어, 샐 틈이 없구나! 귀신이고 뭐고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왜? 나한테서 나왔다 나한테로 들고, 나한테서 나왔다 나한테서 들고 그러는데 그 자리의 조작이지 딴 데서는 조작이 없어, 도저히. 

그걸 아셔야 됩니다. 딴 데서 들어오는 조작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자리입니다. 나고 드는 조작이 거기라는 거를 알게 되면 절대 속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속아서 이리 팡 치고 저리 팡 치고 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석존께서는 속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항복을 했고 자기가 항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서 턱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샐 틈이 없이 여기에서 나고 드는데, 날 때도 샐 틈이 없고 들일 때도 샐 틈이 없는데 아니, 각중에 뭐가 나서….’ 하고선 딱 앉아 있으니까 물리가 터지는 겁니다. 우주의 섭리라든가 이런 문제가 전부 마음으로부터 오관을 통해서 다 섭리가 터지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지, 머리에서 계발을 하려고 하지 마시고 마음에서 그렇게 들이고 내는 게 빈틈없다는 그 사실에, 즉 뿌리 없는 기둥이 하늘을 받치고 빙글빙글 돌릴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내가 자꾸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오관을 통해서 지혜로운 마음과 또는 물리가 터져서, 참, 용이 됐어도 물이 없어서 헤엄을 못 치다가 물을 만나 헤엄을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그러한 여러분이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정해서 여러분한테 고난을 갖다 줬나, 업보를 갖다 줬나, 칼산지옥을 갖다 줬나, 아수라지옥을 갖다 줬나, 응? 여러분한테 오간지옥을 누가 갖다 줬겠습니까? 여러분이 만들어서 그렇게 여러분이 각본대로 사시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에는 팔자 운명이라는 거, 삼재라는 것이 없다. 고사 지내고 제사 지내고 이러는 것도 간단하게 내 마음으로 둥글려서 한 떡이라면, 떡을 하나 집어 먹었다면, 떡이란다고 또 떡으로 알지 마시고요. 보이는 떡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전체 떡을 말하는 겁니다. 전체 떡을 보이는 떡 하나로다 비유를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 떡 하나를 놓고서 내가 왜 제사를 지내라느냐 하면 뜻이 깊습니다. ‘주인공’ 할 때는 전체가 둥글어집니다. 여러분은 각자, 각기 주인공 하면 그저 나 하나의 개별적인 걸로 알지 마세요. ‘주인공!’ 하면 벌써 전체로 돌아갑니다. 이 위력이 얼마나 당당하고 신비한지 아주 참, 무슨 말로도 할 수 없는 도도한 겁니다. 전체로 둥글리는 그 마음 하나라면 절을 꼬박꼬박 백팔배를 안  해도 한생각에 한 번 절한 것이 한꺼번에 만 번이 될 수 있고, 천 번이 한꺼번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일일이 따져서 칠성각에 절하고, 여기 절하고, 저기 절하고…. 그 많은 중생, 이 우주에 꽉 찬 그 생명들한테다가 다 절하려면 얼마를 해야 되겠습니까? 벌어먹지도 말고 절만 해도 다 모자라요. 그러니 그저 단 한 번에 뿌리를 뽑을 수 있는 그런 전력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서 따로따로 절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백팔배하고 만배 할 거를 단 한 번에 둥글려서 딱 하나를 세우시란 말입니다. 그래 놓고 자기에게 급한 게 있으면 ‘주인공, 당신밖에는 못 해!’ 이걸 둘로 둬서는 아니 돼. ‘당신밖에는 내 몸을 고칠 수가 없어. 내 몸이 아니라 당신 몸을 당신이 고칠 수밖에는 없어, 당신이 형성시켰으니까. 그렇게 해서 시자를 끌고 다니는 것도 주인이 끌고 다녀야잖아.’ 또 안 되는 게 있으면 ‘당신밖에는 할 수가 없어!’  그러곤 믿어. 감사하게 된 거는 감사하다고 믿어. 

이렇게 한다면 가정은 얼마나 풍부해지며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생동력 있으며 또 자식한테는 뿌리가 튼튼하게, 싱싱하게 되며 위로는 묵은 빚을 갚게 되겠습니까. 묵은 빚을 갚음으로써 다시금 그 부모가 햇빛으로 나올 때에 정말이지 통장을 가지고, 싱싱한 뿌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옴으로써 자기는 자기대로 또 그것이 거름이 된다 이 소립니다. 잘 이걸 음미해 본다면 우리는 남의 소리만 듣고 이러고저러고 하지 않을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7년 4월 19일 정기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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