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는데도, 왜 자꾸만 집착하게 될까요?”집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절실하게 느낀 사람들이 간혹 던지는 질문이다. 그들은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을 잡아보지만, 그 다짐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곤 한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동안 집착하면서 살아왔던 에너지가 무의식에 가득 차있는데, 한두 번 마음먹는다고 사라지겠는가. 마치 수십 년 피운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기 힘든 이치와 같다. 집착이 쌓이는 데 들인 시
공부나 운동, 음악을 비롯하여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흥미를 갖고 열심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귀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심(發心)이라 한다. 불교에서 발심은 깨치겠다는 마음(菩提心)을 내는 것이다. 깨침은 불교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다고 해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잘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공부의 마음을 내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평소 알고 지내던 불자 한 분을 만났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안녕하세요, 보살님.’ 하고 인사를 드렸다. 순간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무속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실수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불교용어를 사용하는 데 남의 눈치를 봐야 되나 하는 생각에 화가 올라왔다. 무속인은 ‘보살’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용어에 담긴 의미가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
“미륵보살과 미륵불은 같은 분인가요, 다른 분인가요?”언젠가 한 불자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미륵이란 이름은 동일한데, 뒤에 붙는 호칭이 다르다 보니 같은 분인지, 아니면 다른 분이지 궁금했던 것 같다. 결론은 간단하다. 미륵보살이 수행을 완성하여 성불하면 미륵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살은 깨친 붓다가 되기 이전의 수행자를 가리킨다. 현재 미륵은 도솔천에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미륵보살이라고 한다. 이 보살이 56억 7천 만 년 후에 이 땅에 내려와 성불한 후, 즉 미륵불이 되어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것이 미륵신앙의 요체다.
2004년도에 개봉한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손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하는데, 그래서인지 아라한을 절대내공을 지닌 신비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고 깨침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까지 아라한은 모든 수행자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 위상과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불멸 후 200여 년경 마하데바(Mahdeva), 한역불전에는 대천(大天)이라 불리는 비구가 있다. 그는 열심히 수행하여
20살 시절 큰형님이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게 되었다. 그 당시는 양복점에서 치수를 재고 옷을 맞춰 입었기 때문에 비교적 몸에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잘 안 입던 옷이어서 그런지 조금은 불편했다. 양복을 입은 설렘에 한껏 폼을 잡아보았지만, 폼이 잘 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폼 잡기도 쉽지 않지만 폼 나기는 더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옷 입는 것도 그러한데, 우리네 삶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깨침의 세계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삶,
붓다의 깨침은 언어의 길이 끊어진 종교적 체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는 깨침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45년 동안 자신이 깨친 진리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경전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깨침의 세계가 언어를 넘어서있다고 하지만, 언어 이외에 그 소식을 전할 마땅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직접 종교적 체험을 한 이들에게 언어는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ㆍ1889~1951)의 유명한 말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데, 사람의 감정이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을 예단해서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서로 확인이 가능한 것들에 한해서다. 예를 들어 두 친구가 길을 걷다 하늘을 보더니 “먹구름이 몰려오는
우리나라는 부처님오신날(음4.8)을 비롯하여 출가재일(2.8), 성도재일(12.8), 열반재일(2.15)을 불교의 4대 명절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찰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부처님오신날을 제외한 나머지 기념일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젠가 제법 규모가 큰 교구본사를 방문했다가 올해 성도절을 어떻게 기념했는지 물어봤더니, 절에서는 특별한 행사 없이 평소처럼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날인데, 그냥 지나쳤다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그렇다면 불교에서 성도재일(成道齋日)은 왜 중요한 의미
지금까지 붓다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개발된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행체계를 살펴보았다. 오늘날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정에 맞는 수행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각자의 성향이 다른 만큼 그에 어울리는 여러 수행법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붓다 역시 대기설법(對機說法), 즉 대중들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수행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택하여 신행의 기초로 삼으면 되는 일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름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일이 필요하다.그런데 일반인
‘식사는 하셨습니까?’오늘날에도 흔히 쓰이고 있는 인사말이다. 몇 해 전에는 모 방송국에서 ‘식사하셨어요?’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밥 한 끼 먹는 것이 큰일이었던 배고픈 시절의 정서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말 대신 ‘공양은 하셨습니까?’라는 독특한 표현을 쓴다. 그래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공양(供養)이란 밥 먹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대중들이 모여서 발우(鉢盂)에 음식을 담아 함께 식사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를 대중공양이라고 한다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련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 가운데 〈반야심경〉을 사경(寫經)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날 저녁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한 글자씩 종이에 베껴 쓰는 수련을 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270배를 하면서 〈반야심경〉 전체를 쓰고 읽은 셈이 되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경험이었지만,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왠지 모를 고요함이 느껴졌다. 이전에도 경전을 공부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성껏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사경을 수행이라 생각하고 실천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사경
불교에 입문하여 처음으로 법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책도 보지 않은 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합송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우리나라 불자들이 많이 독송하는 〈천수경(千手經)〉이었다. 그렇게 긴 글을 어떻게 암송하는지 궁금해서 한 분에게 물어보니 2, 3년 정도 매일같이 독송하면 저절로 외워진다는 것이었다. 특히 천수다라니를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보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문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외워야 효험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등산을 하다 보면 산행은 운동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이들은 뭔가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정리하려고 산에 가곤 한다. 처음에는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르막이 나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뭔가를 정리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산을 오르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생각이 텅 비워지는 무념(無念)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 정리가 된다. 그저 땀을 흘렸을
대화(dialogue)란 서로 다른 두 가지(dia) 방식(logos)이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는 기본적으로 통하기가 쉽지 않다. 진보와 보수 간에 소통이 어려운 이유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양식이 만나서 묘하게 소통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살펴볼 염불과 선이 그렇다.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서방정토에 낳고자 하는 타력적 신앙이지만, 선(禪)은 치열한 자기 수행을 통해 깨침에 이르는 자력적인 길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수행체계가 어
법회의식 가운데 정근(精勤)이라는 순서가 있다. 이는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인데, 대개 법문이 끝난 후반부에 진행되는 의식이다. 이때가 되면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염불(念佛)을 시작하며, 법회에 참가한 불자들은 염불을 따라하면서 절을 하거나 불전함으로 나아가 각자 준비한 보시금을 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정근은 법회가 열리는 법당의 주불(主佛)에 따라 그 대상과 내용이 달라진다. 만약 대웅전에서 법회가 열리면 ‘삼계의 도사이자 사생의 자애로운 어버이며 우리들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南
어떤 이는 스펙터클한 액션영화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조용한 느낌의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묘한 감동과 재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음악도 에너지 넘치는 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한 느낌의 뉴에이지를 즐겨 듣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시원시원하게 말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거나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불교의 수행체계도 마찬가지다. 간화선과 같이 직접적이고 거침없는 스타일의 수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묵조선(默照禪)과 같이 묵언(默言)을 중시하며 좌선을
오랜 시간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 중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현대인에게 잠시 멈추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가치들이 비로소 보인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반인에게도 많은 인기가 있었고 저자인 출가사문을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이 멋진 제목은 천태종의 수행체계인 지관(止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과연 멈추면(止) 어떤 것들이 보이는(觀) 것일까?지관은 천태지의(天台智? 538~597)에 의해 확립된 수행법이다. 이 수행체계는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8정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800년을 이어온 한국불교의 전통이자 근간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위빠사나, 아나파나사티 등 다양한 수행법의 소개로 그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간화선의 위기라는 말 또한 많이 회자되고 있다. 간화선은 오늘의 한국불교를 있게 한 경허, 만공, 효봉, 구산 등의 선사들을 깨침의 세계로 인도한 수행법이다. 간화선의 전통이 끊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은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苑, 1089~1163)가 개발한 수행
널리 알려진 것처럼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선불교를 중국에 전한 인물이다. 선(禪)이 전래되면서 적지 않은 오해들이 생겼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선불교가 언어, 문자를 부정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 같다. 선에서는 문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서(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선에서 부정하는 것은 언어, 문자가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문자에 머무는 한 결코 진리라는 달을 볼 수 없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