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달마스님으로부터 중국의 조사선(祖師禪)에서 이어온 수행법이다. 조사선은 육조혜능 이후 마조(馬祖)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사님들에 의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성(聖)스럽다, 성스럽지 않다는 분별심을 초월한 경계이며, 일체 분별심을 놔버리고 생각 이전 무분별(無分別)의 입장에서는 결코 ‘안다, 모른다’를 뛰어 넘은 유불회론(唯不會論)이라, 오직 모르고 모를뿐이다.참선은 알고 있는 분별 세계서 모르는 무분별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대혜 스님의 ‘이 뭣고’도 오직 모를뿐에서 시작이며 ‘이 뭣고’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실존 문제이며, 본
진실(眞實)과 허망(虛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을 허망이라고 깨닫는 그것이 곧 진여(眞如)이고 여래장(如來藏)이다. 공(空)을 통하지 않고, 허망의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서는 불도를 이를 수가 없다. 망령(妄靈)된 마음이 허망인 줄 깨달으면 허망한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며 해탈을 이루게 된다.삼라만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거짓인 가(假)이며 색(色)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것으로, 공(空)에서 이루어지고 만유만사가 공에서 연기하며, 영원불변의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인
조주(趙州) 선사께서 하루는 임제사(臨濟寺)를 방문해 발을 씻는 차에 임제 선사 께서 다가와 물으시길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서 오신 뜻 입니까?”라고 하시니, “마침노승이 발을 씻고 있는 중이니라”고 답하였다. 이에 임제 선사께서 가만히 조주 스님께 다가가서 귀를 기우리고 들으시는척 하니, 조주 선사께서 “알면 바로 알 것이지 되세김질 해서 무엇 하려는고”하시니, 임제 선사께서 팔을 흔들며 돌아가셨다. 제일구(第一句)에서 깨치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라고 했고, 제이구(第二句)서 터득하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 하였다. 듣고 바로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무형(無形)을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서로 통하고 있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虛空)이고 허공이 바위이다.예를 들어 바위를 자꾸 나누어 가다보면 분자(分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분자는 또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원자도 소립자(素粒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결국 소립자 뭉치인 것이다. 그러면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충돌해서 입자(
조주(趙州) 선사께서 하루는 임제사(臨濟寺)를 방문해 발을 씻고 있을 때, 임제 선사께서 다가와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침 노승이 발을 씻고 있는 중이니라”라고 답하였다.이에 임제 선사께서 조주 스님에게 다가가 귀 기울여 듣는척 하니, 선사께서 “알면 바로 알 것이지 되새김질 해서 무엇 하려는고”라고 하자, 임제 스님은 팔을 흔들며 돌아 셨다.제일구(第一句)서 깨치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라 했고, 제이구(第二句)서 터득하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듣고 바로 깨치면 제일구이며,
반산보적(盤山寶積)(마조도일의 제자) 선사가 걸음걸음 화두를 놓치지 않고 시장을 지나가다가 식육점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어떤 사람이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와서 말했다.“깨끗한 고기 한 근만 주시오”주인이 들고 있던 칼을 내려 놓고 양손을 모으고 차수(叉手)하면서 말했다.“어떤 것이 깨끗하지 못한 고기입니까?”깨끗함과 더러움, 옳고 그름, 선과 악등의 범부와 성인, 부처와 중생이라는 모든 차별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광경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보적 스님의 마음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후 어느날 마을 동구 밖을
백장선사가 마조선사를 친견하러 갔을 때 마조가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우자, 백장이 물었다.“이것 그대로 마음을 씁니까? 아니면 이것을 떠나서 마음을 씁니까?”마조가 불자를 선상 귀퉁이에 걸어놓고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그대는 훗날 이렇게 두 입술을 함부로 놀리면서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려는가?”이에 백장이 마조의 불자를 빼앗아 꼿꼿이 세우자 마조가 말했다.“이것 그대로 마음을 쓰는가? 아니면 이것을 떠나서 마음을 쓰는가?”백장이 불자를 들어 선상 귀퉁이에 걸었더니 마조가 우렁찬 할을 내지르니, 백장은 그 소리를 듣고 3일 동안 귀가
중생들은 색(色) 성(聲)을 필연적으로 쫓아 따라 가는 꿈의 세계에 살고 있으나 ‘이 뭣고’ 수행은 내안의 공성(空性)으로 회귀(回歸)시키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인 것이다.무엇이 불법의 대의 입니까?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묻든 지간에 일생동안 검지 손가락 하나만 세워 보였다. 구지 선사 곁에서 시봉 하던 시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선사가 출타중 마침 어떤 스님이 찾아와 “요즘 스님의 법문은 어떠신가?”하고 물으니 아무 말없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여 주었다.매일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니 스님의 흉내를 낸 것이다. 선사께서 돌아오
시공(時空)을 벗어난 시심마(是甚) 시(是) 자리는 면남간북두(面南看北斗)라, 동서남북이 탁 트인 십방(十方)이 공(空)인 시무애(時无涯)자리이며,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 우주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 처무애(處无涯)인 원각(圓覺)의 자리이다.보리자성(菩提自性)인 시는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고 참 생명이며, 항상 지혜광명(智慧光明)이 밝게 비추고 있으며, 자타의 간격이 없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무처무시(無處無時)한 절대(絶對)의 자리이다. 깨달으면 본래부터 갖춰진 그 자리와 하나
부처가 둘이 아니고, 색공이 둘이 아니라지만, 결국 경계에 부딪히니 귀천을 나누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별했다.사법계(事法界)는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니 물에 안 빠지고 싶지만 빠져서 괴롭고, 결혼도 하고 헤어지고, 성공도 실패도 하는 것이 인생살이다.‘이사무애법계(理事无涯法界)’는 큰 배를 타고 파도의 원리를 이용하기 때문에 물에 안 빠지게 된다. 그러나 물에 빠진다 안빠진다를 떠나서 물에 빠지면 전복을 따고 진주 조개를 주우면 되니 둘로 나누지 않는 세계가 ‘사사무애법계(事事无涯法界)’이다. 원효대사가 당대 최고의
홀연이 문득 소(牛)가 되어도 멍에 매는 콧구멍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삼천세계가 내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도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할 일 없는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경허선사의 ‘무비공심’에 대한 유래는 이렇다. 당시 동은이라는 시자승(侍者僧)의 부친 이처사는 여러 해 동안 수행하여 스스로 깨침을 얻었는데, 어느 날 그 은사인 도일 스님이 이처사를 만나 차담을 하게 되었다.이처사가 말하길 “중(僧)이 중 노릇 잘못하면 마침내 소(牛)가 됩니다”라고 하니, 도일 스님이 이 말에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시주(施主)
오늘은 대둔산 태고사(太古寺)서 100일 동안 체중이 15kg이나 빠지면서 하루 3천배씩 30만 배를 시작으로 100만 배 감사회향(感謝回向)을 한 뜻깊은 날이다.멸아만시하심즉성불(滅我慢是下心卽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최고다 하는 아만심서 벗어나 머리가 땅에 닿게 낮추어 하심(下心)이 되어야 부처를 이룬다. 즉 아무리 도(道)에 이르렀다 해도 조금이라도 아만병(我慢病)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성불(成佛)이 아니다”라는 말이다.중생이 아만서 벗어나는 길은 그 원인이 되는 사번뇌(四煩惱)인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
간택(揀擇)이란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좋고 싫은 것이 한 생각일 뿐, 그 생각이 없으면 자연히 따라서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중국 수대(隨代) 선승인 삼조(三祖) 승찬 대사는 젊은 시절 풍질 문등병에 걸려 천형(天刑)으로 믿었으며, 그 죄를 참회키 위해 이조(二祖) 혜가(慧可)를 찾아갔다.“제자의 몸이 풍질에 걸렸습니다. 청하건데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대사가 말했다. “죄를 찾아온다면 자네를 참회시켜 주겠네”승찬이 묵묵히 있다가,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사왈 “내가 그대의
"망념인 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고그생각이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 업식을 재연못하도록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뭣고’로 잘라내고사(邪)가 아닌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것이 참 수행"참선(參禪)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그 한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로 돌아 오는 것이다. 육조 스님의 일행삼매에 “일상시(日常時)에 가거나 머물거나 않거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직심을 행해야 한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갖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오직 직심으로 행동해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
“나는 산과 물을 벗삼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건네주며 대자연과 함께 노니는 것이 형님의 삼공지위(三公地位)와 바꿀 것 없는 내 복이라 생각해 찾지 않았습니다”당나라 때 배휴, 배탁이란 등이 붙어나온 쌍둥이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외삼촌 집에 의탁하며 살고 있던 중 한 스님과 외삼촌과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 이 집서 같이 살면, 이 집안도 망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들은 외삼촌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떠돌다가 산중 암자서 부목일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침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가 황벽 스님의 문중에서 수행할 때 그 행(行)이 순수하고 깊이가 있으므로 윗 수좌인 목주 스님이 물었다."그대는 여기에 와 있는 지가 얼마나 되는가?”“3년이 됩니다.”“지금까지 조실(祖室)스님에게 법을 청한 적이 있는가?”“아직 묻지도 않았지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그대는 어찌 조실스님께 불법의 대의(大義)를 묻지 않는가?”이에 임제 스님은 바로가서 물었다.그가 묻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 스님은 바로 몽둥이로 후려갈기니 왜 맞는지도 모르고 기어 나왔다.목주 스님이 다시 물었다.“문답은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의존성으로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공이며, 무상과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중도’라고 한다”‘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披無) 차생고피생(此生故皮生)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는 말이 있다.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관관계 속에서 생하고 멸하니 둘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원리를 연기법이라 하고, 이는 인연생기(因緣生起)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 신물실제소무(愼物實諸所無) 호주세간(好住世間) 개여영향(皆如影響)”이라. 이를 설명하면 “다만 있는 것 비우기를 바랄지언정 없는 것들을 함부로 채우지마라”이다. 이는 그 유명한 방거사의 임종게이다.하루는 방거사가 큰 신심과 용기를 내어 석두 선사를 친견하고, 불여만법위여자(不與萬法爲如子) 시심마인(是甚人) 잇고? 라 물었다.해석하면 “만 가지 진리의 법으로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하는 자, 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석두 선사가 그 즉시 방거사의 입을 틀어 막아 버렸다. 여기서 방거사는 홀연히 진리의
인류의 역사속에 이어진 수많은 전쟁과 혼란의 시초는 무명의 한 생각서 시작됐다. 사회적인 지위, 권력, 명예 등도 역시 허상(虛像)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 문제를 뒤로하고 전도돼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다. 불지견(佛智見)이라는 말이 있다. 오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가 생겨나서 오온이 청정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생활속에서 ‘이 뭣고’ 수행으로 깨닫고,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말하며,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을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우리의
“불성, 불법, 부처, 천지만물을 비롯해 나(我)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동시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며, 그래서 마음 작용인 ‘일체유심조’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이다”화엄경 사구게에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는 말이 있다.이는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내며,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 참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