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경쟁적으로 아시아를 식민지화했다. 중국도 이런 고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중국 안팎으로 아편전쟁(1839~1842)을 비롯해 태평천국의 난(1851~1864)·청일전쟁(1894~1895)·신해혁명(1911~1912) 등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어서 1922년 군벌타도를 목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1차 국공합작,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에 이어 국민당과 공산당이 4년 여 간에 걸친 국공내전에서 결국 공산당의
청나라는 명대의 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불교 모든 종파가 그러했지만, 더 이상 불교는 발전되지 못했다. 거의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선종의 쇠락은 외부적 요인만은 아니다. 선의 활발발한 생명력은 사라졌고, 새로운 선이 창출되지 못했다. 청말의 선은 교종의 여러 종파와 융합하는 속에서 본연의 선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허운 선사가 활동하였다. 허운(虛雲, 1840~1959)의 선은 우리나라 선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대 중국 선객들은 그의 법력은 흠모하고 있다. 한국에도
덕청의 행적 감산덕청(1546~1623)은 명나라 4대 고승 중의 한 명이다. 덕청은 선·화엄·염불 등 불교학뿐만 아니라 수행에도 깊으며, 지극한 염불행자이기도 하다. 덕청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님이기도 하다. 덕청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감산자전〉이 번역되며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선지식이다. 책에서 덕청 선사는 직접 자신의 일생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감산자전〉은 당시 명나라의 불교사와 상황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스님은 20~30대에는 출가 사찰인 남경 보은사·북경·오대산에서 수행했고, 40대에는 산
명나라는 14세기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수 한족이 세운 왕조이다. 1367년 안휘성 출신의 주원장은 어려서 전염병과 가난으로 가족을 모두 여의고, 각황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다. 주원장은 나라를 ‘명(明)’이라고 칭했다. 명나라는 한족의 유교 문화를 회복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조 주원장(1328~1398)은 불교에 호의적이며, 불교를 보호했다. 명대는 교종이 발전했으며, 선종(임제종)과 정토종이 크게 발전했다. 명나라에 훌륭한 4대 고승이 있다. 운서주굉·감산덕청·우익지욱·자백진가이다. 이중 명대를 대표하는 선사를 한
우리나라는 간화선 종주국이다. 중국 당대에 유학승들에 의해 선사상이 유입되면서 고려 말기까지 선사상이 들어왔다. 간화선은 고려 중기, 보조 지눌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 고려 말기 간화선이 풍미를 이루었다. 고려 말기 나옹혜근·태고보우·백운경한 등에 의해 간화선이 발전하였지만, 이외 다양한 계층을 통해서도 간화선이 보급되었다. 바로 몽산 덕이(蒙山 德異, 1231~1308)의 간화선이다. 몽산의 선이 유입되면서 덕이본 〈육조단경〉과 더불어 함께 간화선이 한층 발전됐다. 몽산이 한창 활동하려는 무렵은 남송이 망하고, 원나라로 접어든
라마교 신봉한 원나라원대 황제은 라마교를 신봉하고, 라마승들을 지지했다. 이 시기에 라마승들은 국사 지위까지 오르면서 중국불교사에 티베트 불교가 크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원대의 선은 이전 당·송대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흐름이었다. 송대 이후 선자(禪者)가 배출되지 못하면서 불교가 점차 세속화되어갔고, 겨우 명맥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청나라 말 20세기 초 선사인 허운(1840~1959)과 태허(太虛, 1889~1947)도 “당대만큼 뛰어난 선자가 나오지 못한다”며 당시 불교의 쇠퇴를 염려했다. 원대의 선은 불교학
우리나라는 간화선 선풍을 근간으로 한다. 간화선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어록이 몇 있다. 그 가운데 간화선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중요 어록이 〈선요(禪要)〉이다. 〈선요〉의 저자는 송나라 말 원나라 초기에 활동한 고봉 원묘(高峯原妙, 1238~1295)선사이다.조선 초 벽송 지엄(1464~1534)은 〈대혜어록〉을 보면서 ‘구자무불성’을 참구해 의심을 타파했고, 원묘의 〈선요〉를 통해 알음알이(解)를 내려놓았다. 벽송은 평생 동안 원묘의 선사상을 기반으로 선풍을 전개했는데, 벽송 이후부터 우리나라 사찰승가대학의 교과목 가운데 하나가
“봄에는 꽃이 있고, 가을에는 달이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망상에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모두가 좋은 계절이다.(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무문관〉 이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선시이다. 어느 선사가 ‘꽃잎은 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꽃잎은 떨어져도 꽃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존재한다. 피고 지는 생멸하는 현상 속에 변치 않는 영원한 실재가 있다. 그 실재란 실상(實相)이요, 무아(無我)이며, 공(空)을 말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야율초재에 대한 평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이 몽골의 칭기즈칸이다. 고려도 몽골 침입으로 피해가 매우 심했다.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고, 이후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을 만큼 매우 ‘잔인한 민족’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이런 몽골인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잠재운 사람이 있다. 바로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이다. 역사적으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책사요, 불교적으로는 조동종 만송 행수(萬松行秀, 1166~1246)의 제자이다.상하이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국가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재가자 활동이 활발하다. 당나라 때도 재가 선자가 있었지만 송대로 들어서는 재가 수행자들이 더 많아졌다. 비슷한 시대인 고려 시대에도 청평거사 이자현(1061~1125)·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이승휴(1224~1300) 등이 있었다. 북송대에는 임제종 황룡파에 소동파·황산곡·장무진 등 재가자가 많았는데, 점차 양기파로 옮겨졌다. 특히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 종고에 의해 배출된 사대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여기서는 대혜의 재가 제자들과 송대의 대표 거사인
인류사에 여성과 남성의 대결 구도가 있듯이 불교사에서도 이런 면을 배제할 수 없다. 고대 인도에서는 여인의 존재감이 매우 낮았다. 여자들은 아이 낳는 존재로 여겼으며, 이 관념이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본질적인 열등성을 강조하여 인도인들은 여인을 남성과 동물 중간 정도의 존재감으로 보았다. 그런데 부처님법에서는 여인이 하열한 존재가 아니었다. 비구 ‘10대 제일’이 있듯이 〈증일아함> ‘비구니품’에는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변성성불(變性成佛)·비구니 팔경계(八敬戒) 등 왜 여인성불에
대혜종고의 행적 간화선 제창자 대혜종고(大慧宗苑, 1089~ 1163)는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다. 12세에 출가해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대혜는 처음 운문종에서 공부한 후 조동종에서 참구하였다. 이후 다시 임제종 황룡파 담당 문준(1061~1115)의 제자가 되었다. 문준이 병으로 입적하기 전에 대혜를 원오극근에게 천거하며 그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대혜는 스승 문준의 어록을 만들고, 탑명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만난 무진거사 장상영(1043~1121)과 도반이 되었다(1120년). 대혜는 몇 년간 여러 지역을 유행하며 수행하면서도
발밑을 살피라조계종 총무원 청사 들어가는 계단에 ‘조고각하’가 새겨져 있다. 오를 때마다 그 글귀를 새겨본다. 이 글귀를 처음 언급한 선사는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이다. 극근은 앞의 법연 원고에서 법연의 세 제자인 법연삼걸(法演三傑) 가운데 한 분이다.오조 법연은 세 제자들과 함께 출타했다가 밤늦게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초롱불이 꺼져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각자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아라.”스승의 질문에 당황
“세력을 다 부리지 말라.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라. 좋은 말도 다하지 말라. 규율을 다 지키지 말라.(勢不可使盡 福不可受盡 好語不可說盡 規矩不可行盡)” 위의 내용은 송나라 때, 오조 법연(五祖法演, 1024~1104)선사의 말씀이다. ‘법연사계(法演四戒)’라고 하여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애용되는 글이다. 어느 해, 법연이 다른 사찰의 조실로 초대되어 도량을 떠나게 되었다. 제자들이 법연을 찾아와 “스님께서 이번에 떠나시면 언제 또 뵙겠습니까? 저희들이 일상에서 살아갈만한 지침을 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위의 네 가지를
당나라 때는 수많은 선자(禪者)들이 등장했고, 활발하게 수행했다. 이러던 선이 송나라로 들어서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가지인데, 송고문학의 발달과 선종 사찰이 국가불교화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송고문학에 등장한 용어부터 살펴보자. ‘고칙(古則)’이란 옛 조사의 선문답이 보편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므로, 고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공안(公案)’이란 단어는 ‘재판에서 판례에 견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고(頌古)’는 당대 선승들의 언행과 선문답의 취지(趣旨)나 어기(語氣)에 대하여 게송이나 송으로 간결하게 독자적인 해
1)선 문헌에 관한 모든 것 ①선문답과 어록의 성립중국 고유 분류법에 따르면, 선종의 어록은 ‘자(子)’, 저술은 ‘집(集)’이라고 한다. ‘자’는 등 사상적인 기록 문헌이며, ‘집’은 시문집과 같은 문학적 범주에 속하는 문헌이다. 어록(語錄)은 ‘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의 기록 문헌인 이나 은 선문답의 집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조사선 시대에 선문답이 발전하면서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정립했던 선사상이 송대로 들어서면서 어록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 어록의 발달은 중국에서
우리나라 선(禪)은 간화선이다. 하지만 이는 화두를 드는 방법상의 수행법이요, 이론은 조사선이다. 곧 실천은 간화선이지만, 이론적인 근간은 조사선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선 사상을 생략하고, 간화선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간화선을 언급하기 전에 이전부터의 사상인 조사선부터 보기로 하자. 조사선은 무엇인가? 조사선은 대략 8~11세기에 발달했는데, 대체로 이 당시의 선을 선기(禪機)의 시대라고 한다. 본격적인 동아시아 선의 태동으로서 이때 정립된 선이 근자에까지 이른다. 당대 선기의 시대를 지나 문자선(송고문학)이
당나라 때에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었는데, 선종(禪宗)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 대체로 선종은 오롯이 자신의 수행에 집중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중생을 향해 보살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층이라는 말인가? 답을 직언하면, 그렇지는 않다. 어록에서 선사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기원전 1세기 전후, 수행과 실천의 병행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대승불교는 ‘어떻게 보살의 길을 지향하느냐’를 고민하며, 참 종교로 거듭났다. 초기불교에서 석존에게 국한했던 보살이란 용어가 대승불교로 오면서 ‘자리이타’ 실
북송의 선종은 5가에서 7가로 발전되었다. 곧 5가 가운데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로 분파되었다. 양기파의 방회는 강서성 평향 양기산에서 선풍을 전개했고, 황룡파의 혜남은 강서성 남창 황룡산에서 선풍을 전개했다. 황룡파는 황룡 혜남에서부터 허암회창(虛庵懷敞, ?~?)까지 단 8대 200여 년간 지속되다 단절되었다. 이후 양기파만 남아 임제종을 대표했다. 북송 후기에서 남송대로 접어들어 선종은 이미 임제종 천하였고 조동종이 겨우 연명하고 있는 ‘임천하동일우(臨天下洞一隅)’였다. 양기파는 송·원·명·청대에까지 가장 번성한 선종 종파였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 북송 대에 이르는 동안에도 선종은 면면히 발달하고 있었다. 이때는 5가 가운데 운문종·임제종·조동종의 선풍만이 전하였다. 선종사에서 임제종을 거론할 때는 임제종의 분파에서 나온 황룡파와 양기파, 즉 임제에서 시대를 거슬러 뛰어서 황룡과 양기만을 거론한다. 하지만 임제의 법을 받은 흥화존장~석상초원까지의 선풍을 생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계종은 임제종 문하의 흐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황룡파와 양기파가 형성되기 이전까지의 선사들을 보자. 풍혈연소 선사 임제의 문하 풍혈연소(風穴延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