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울력, 삼동결제의 공부할 자격선방의 동안거는 김장과 긴밀하게 묶여있다. 겨울철 채소가 귀하던 시절에 김치는 삼동결제(三冬結制)의 가장 소중한 찬이요, 김장은 연중 가장 큰 울력이었다. 추운 날씨에 엄청난 양의 김치를 담그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니, 선방 스님들 사이에 ‘삼동결제는 김장을 함께 해야 공부할 자격이 있다’는 불문율이 있었던 것이다. 수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선방의 김장날짜는 결제 직전에 잡히고, 방부(榜付) 들인 선객들은 김장날짜를 미리 파악해 그때 맞추어 들어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김장에 빠지면 벌칙으로 콩
연기(緣起)로 확장된 효불교 우화 ‘세 사람의 천사’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상(無常)을 일깨우는 무수한 천사들을 만난다고 말해준다. 생전에 악업을 많이 지어 지옥에 떨어진 이에게 염라대왕이 물었다. “너는 어찌 그리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일생을 살아왔느냐! 세상에 있을 때 세 사람의 천사를 만나지 못했더냐?” 이에 “제가 그런 천사들을 만났다면 왜 생전에 착하게 살지 못했겠습니까”라고 답하자, 염라대왕이 말한다. “그렇다면 주름이 많고 허리가 구부러지고, 기운이 없어 걸음과 말씨도 느린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 “그런 노인이라면
우리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마을로 내려오신 미륵’을 만날 수 있다. 폐사된 절터에서 업어온 부처님을 미륵으로 모시기도 하고, 특별한 암석이나 땅속ㆍ바다ㆍ강에서 나온 큰 돌을 세워놓고 미륵으로 받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마을에 모신 미륵을 아기 점지를 바라는 기자신앙(祈子信仰)의 대상으로 섬긴 전통은 뿌리가 깊다. 미륵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보편성을 지니게 된 것은, ‘구세주적 성격’과 ‘존재 방식의 친연성’에서 찾을 수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났을 때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는 미래불(未來佛
최초의 화혼식(花婚式)근대 최초의 불교 혼례는 1918년 2월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에서 치러졌다. 처음 행하는 불교식 혼례라 장안의 화제가 되어, 몰려든 구경꾼이 일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문에는 사모관대를 갖춘 신랑, 족두리에 장삼을 입은 신부가 경건한 표정으로 부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이 실렸다. 이 혼례는 역사학자 이능화(李能和)가 1917년에 만든 ‘의정불식화혼법(擬定佛式花婚法)’에 따라 처음 행한 것이었다. 당시 혼례를 둘러싼 상황은 개항 이후 기독교 문물의 본격적인 유입과 함께, 이른바 ‘예배당결혼식
주체적ㆍ능동적 존재로서 태아생명의 잉태만큼 신비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태 속에 한 생명이 잉태되는 일을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물학적 인자가 결합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윤회 속의 한 생명 에너지가 부모와 인연이 되어 만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거치는 동안 서로 연기(緣起)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각별한 인연이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생명 에너지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은 업은 잠재적 에너지 상태
보살이 아니고서야후원 살림을 관장하는 원주(院主)는 사찰음식에 밝고 섬세한 성품을 지닌 스님이 주로 맡는다. 대중의 식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가운데 직접 음식도 만들어, 한 사찰의 공양 내용을 좌우하는 데는 경제 사정 못지않게 원주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찰 살림이 가난하든 윤택하든 대중의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공양을 책임져야 할 막중한 소임이기에, ‘보살이 아니고서야 원주를 오래 못 산다’는 말도 생겨났다. 원주는 공양간 근처에 머물면서 재료 조달과 식단을 궁리해 주기적으로 장을 봐오고, 계절의 흐름에 맞춰 밭농사를 설계하며
수선안거(修禪安居)의 전통스님들은 여름ㆍ겨울의 안거 철이 되면 선방(선원)을 찾아다니며 안거에 든다. 선방에서 참선 정진하는 스님들을 수좌(首座)ㆍ납자(衲子)라 하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선을 닦는다고 하여 선객(禪客)이라고도 부른다. 선객들은 머물고자 하는 사찰에 먼저 허락을 얻게 되는데, 이를 ‘방부(榜付) 들인다’, ‘입방한다’라고 표현한다. 방부는 ‘용상방(龍象榜)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이고, 입방은 ‘入榜’과 ‘入房’이 두루 쓰인다. ‘入房’은 선방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入榜’은 용상방에 이름이 든다는 말이니, 일관된
학업과 노동의 병행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은 스님들은 강원(講院)에서 4년간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는 학인으로 살아간다. 계를 받고 예비 스님이 되었으니 사찰에서는 이들을 ‘새 중’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국의 예비 스님들이 강원을 운영하는 사찰에 모여 학생 신분으로 배움의 길을 가는 가운데, 출가자로서 사중의 일을 두루 맡아 하나씩 익혀가는 시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인들은 대방에서 숙식과 공부를 하며 함께 살아가, 출가자의 일생을 통틀어 진정한 대중생활이 이루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인원이 많아 전체 학인을 한방에 수용할 수 없
삭발과 입방을 거쳐 스님들은 출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행자(行者) 시절을 꼽는다. 그 무엇보다 대중과 함께하는 초심시절의 마음공부가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 승려노릇 한다”는 말도, 대중을 위한 하소임을 수행으로 여기며 살아온 행자의 삶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행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삭발이다. ‘머리를 깎는다’는 말이 출가를 뜻하듯이, 삭발은 속가와 단절된 출세간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징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막 바로 행자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사찰 일꾼들과 함께 기거하
부처님과 제자들의 청식불교에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은 두루 쓰이는 말이다. 여럿이 함께 공양한다는 뜻을 지녔지만, 주로 재가자가 출가 대중에게 음식 등을 올리는 뜻으로 쓰인다. 출가자는 오로지 수행에 힘써 깨달음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며, 재가자는 이들을 지원하고 보시함으로써 공덕을 얻는다. 따라서 대중공양은 불교의 시작과 함께해온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 당시 비구들은 탁발 걸식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점차 재가자들이 집으로 청해 공양을 대접하거나 정사(精舍)로 음식을 가져와 공양 올리기를 원하면서, 이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고해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옛사람들은 무덤 속에 배를 그리거나 새겼다. 죽은 이의 영혼을 배에 실어 사후세계로 무사히 데려가기를 바라는 주술적 염원이다. 동서고금 없이 배는 미지의 이상세계를 향한 이미지와 짝을 이루어왔다. 수평선 너머 망망대해로 떠나는 배가 인간이 꿈꾸는 피안의 세계로 데려다줄 이동 수단이라 여긴 것이다. 마을에서는 배가 나아가는 모습의 행주형(行舟形) 지세를 최고의 입지로 꼽는다. 이는 만선(滿船)이 드나드는 풍요로운 부촌임을 뜻하고, 홍수에도 마을을 안전하게 지키는 ‘구원의 배’가 되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
스님들의 소풍노스님들이 들려주는 단오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단오가 스님들의 소풍날이기도 했다. 설ㆍ추석을 제외하면 명절을 금하여 ‘단오’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사찰도 있었지만, 대개 출가수행자들도 삶에 기반을 둔 자연 세시(歲時)의 변화를 함께 즐겼다.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단오에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아 사찰에 재가 없으니, 이날은 수행자 중심의 명절을 보낼 수 있었던 셈이다.스님들의 소풍은 곧 산행을 뜻한다. 여름이 시작되는 단옷날 마을에서 씨름ㆍ그네 등의 놀이를 하듯이, 더위를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 스님들도 산에 오
음양이 교차하는 오월올해는 음력 오월의 초입에 하지(夏至)가 들었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를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하지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하지 다음 날은 양수(陽數) 5가 중첩되어 연중 양기가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단오(端午)이다. 이처럼 양력 유월의 21일과 22일에 나란히 하지와 단오가 들었으니, 민속 통념으로 보자면 나쁜 음기를 몰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시절인 셈이다. 동지를 ‘작은 설’이라 불렀듯이, 대척점의 하지는 한 해의 반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날이다. 왕성한
내 등(燈)은 내가 지킨다이삼십 년 전만 해도 부처님오신날이면 목욕재계한 신도들이 하루 전날 절에 와서 밤새워 기도하는 문화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기로 등을 밝히던 시절이 아니었고, 등 안에 초를 꽂아 불을 켰으니 화재의 위험 때문에 ‘법당 등’의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전날 밤부터 대웅전 앞마당에 등을 달았는데, 그들은 법당에서 기도하지 않고 돗자리를 펼쳐놓은 등 아래서 밤을 새웠다. 바람이 불면 두 손으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듬어, 밤새 자신의 소망이 담긴 등을 지키며 기도한 것이다.인근 부석사에서도 철야기도를 하며 부처님오신
영가를 위한 통과의례천도재에서 영가의 관욕은 통과의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관욕으로 업과 번뇌를 씻은 뒤, 부처님 앞에 나아가고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욕의 절차는 영가가 생전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삼업(三業)을 정화하고 새 옷을 갈아입는 의미로 진행된다. 따라서 비밀스럽고 신묘한 성격을 지녀, 병풍을 치거나 가설공간으로 관욕단을 마련하여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관욕의 절차는 병풍 안팎에서 이원적으로 전개된다. 병풍 바깥에서는 법주 스님이 세부 절차에 따라 진언을 염송한다. 업의 정화과정을 몸ㆍ입ㆍ얼굴 등을
의례에서 ‘물’이 지닌 상징성 종교의례에서 물이 지닌 상징성은 매우 크다. 생명의 근원이자 모든 걸 깨끗이 씻어주는 물의 정화력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신성성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물은 초월적 존재에게 올리는 공물(供物)인 동시에 부정(不淨)을 씻는 필수요소로 여겨졌다.의례에 쓰는 물을 맑고 깨끗하다는 뜻에서 ‘청수ㆍ정수’라 하고, 이른 새벽 샘에서 길었다는 뜻에서 정화수(井華水)라고도 부른다. ‘물 한 그릇 떠 놓고 식 올린다’는 말이 있듯이, 신랑ㆍ신부가 서로의 머리를 틀어주면서 치렀던 가난한 이들이 전통 혼례에서도 빼놓지 않는
한국에서만 전승되는 예수재사후를 위해 미리 복덕을 쌓는 의례라 하여 생전예수재를 ‘살아있을 때 올리는 천도재’라 보기도 한다. 망자를 대상으로 한 천도재와 비교할 때 예수재의 가장 큰 특징은 ‘시점’과 ‘주체’이다. 시점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생전에 미리 치른다는 것이고, 주체는 재자(齋者)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재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주체적 의례라 할 수 있다. 모든 천도재는 주인공이 망자이기에 남은 자들이 치러주는 타행(他行)의 의례이다. 이에 비해 예수재는 스스로를 향한 자행(自行)의
생전예수재, 생전에 만드는 수의올해는 이월에 윤달이 들어 사찰마다 일찌감치 생전예수재(生前預修齋) 입재 법회를 봉행한 소식이 분주하다. 백여 년 전인 1917년에 순천 송광사에서 예수재를 행한 기록이 전하는데, 당시의 예수재도 윤이월이었다. 이는 통영에 거주하는 부부를 위한 독설판 예수재로, 윤 2월 2일에 입재하여 열사흘이 지난 14일에 회향했다고 한다. 당시 지전을 만드는 조전소(造錢所)를 설치하고, 각종 번(幡)과 개(蓋), 지화와 서기포(瑞氣布) 등의 장엄을 갖추어 의식문에 따라 봉행한 여법한 예수재였다.이처럼 오늘날과 마찬
‘좌체우용’의 이치 ‘성인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본다.’ 이러한 배북향남(背北向南)의 방위는 동양문화권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상징적 기준이다. 따라서 주존의 자리에서 봤을 때 좌는 동쪽이고 우는 서쪽이 해당하여, 이를 ‘좌체우용설(左體右用說)ㆍ체용설(體用說)’이라 부른다. 좌측(동)은 근본이 되고 우측(서)은 작용을 나타낸다는 뜻으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러한 원리를 살펴보자. ‘영산회상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주변에 10대 제자를 그린다. 그 가운데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짝을 이루어 배치되게 마련이다. 이때 부처님의 좌측
방위의 설정우리는 실제의 자연 방위와 무관하게 공간을 인식한다. 동서, 남북, 좌우 등으로 공간을 설정하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이며 일종의 약속이다. 공간을 체계적인 세계로 구조화하는 것이기에, 출발점을 잊어버리면 질서가 흐트러지고 만다. 상징적인 의례를 행하면서 공간의 약속을 반영하지 않거나, 합당하지 않게 설명하여 혼란을 가중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에 공간에 대한 인식을 2회로 나누어 풀어나가고자 한다.동양문화권의 방위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쪽을 설정하는 일이다. 실제 방위와 무관하게, 그 공간의 주인공이 자리한 곳을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