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초원을 달리던 몽골의 군사들이 침략하면서 천년을 지켜온 황룡사 9층 목탑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은 물론, 20년에 걸쳐 만든 초조대장경마저 잿더미가 됐다. 이에 맞서 고려 조정은 온 나라의 힘을 모아 또다시 팔만대장경 제작에 나섰다. 이처럼 전란에 휩싸인 한반도의 격변하는 시대 상황은 탐라국으로까지 밀려왔다. 탐라국은 고려 숙종 1105년에 군사·경제적 이유로 한반도의 역사 속으로 편입됐다. 이때부터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현)으로 바뀌면서 독립적 지위는 막을 내린다. 이어 고종
어느덧 햇살에 등을 기대는 계절이다. 그 햇살이 신비로워 ‘광령(光靈)’이라 불리던 곳이 있으니 바로 제주시 ‘광령(光令)’이다. 지금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다’ 해 광(光)이요, ‘주민이 밝고 선량하다’ 해 령(令)이라고 하지만, 이원진의 에서는 ‘광령(光靈)’으로 기록돼 있다. 이 마을의 ‘절동산’에 자리한 향림사 경내에는 예로부터 ‘절물’이라 불리는 샘이 있는데 이곳에 있었다는 고대사찰 ‘영천사(靈泉寺)’의 샘에서 유래한 것이다. 길을 걸어보니 이 물 맑은 옛 영천사지가 에서 “제주목관아에서 서쪽
제주시 애월읍에는 ‘유수암(流水岩)’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유수암천(泉)’의 비석에는 “한라산 서북 나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십리에 봉소형(蜂巢形)을 이루었고 감천이 용출하니, 유수천(流水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 맑은 이 숲에 마을이 태동한 것은 삼별초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삼별초의 김통정은 고려 원종 12년인 1271년 진도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자 남해현의 유존혁과 합류해 제주로 들어왔다. 제주에는 이문경의 삼별초가 고려의 김수와 고여림의 군사를 꺾고 승기를 잡은 상태였다. 제주
후풍도(候風島), 제주의 첫 관문인 추자도의 옛 이름이다. 바람의 길 위의 섬이다. 조선 최고 표해록 중의 하나인 최부의 〈금남표해록〉도 추자도에서 태풍을 만나면서 시작된다.추자도는 사람이 최초로 거주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주도와 한반도를 잇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고려사〉에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여몽연합군과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최영의 병력도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후로 주민들은 최영의 사당을 세워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바람의 섬은 격변의 역사를 겪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
비가 참 많이도 오는 장마다. 이때가 되면 제주는 더욱 아름다운 섬이 된다. 건천으로 말라 있던 하천들이 한라산 정상으로부터 물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줄기, 돈내코 원앙폭포로부터 바다로 흘러 쇠소깍에 이르는 효돈천의 풍광은 더욱 그럴싸하다.효돈천의 옛 이름은 영천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를 보면 ‘영천천(靈泉川)’으로 돼 있는데, 조선 말기 〈조선지형도〉에는 ‘효돈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천천의 이름은 사찰명에 유래해서 불리다가 조선 중후기 불교의 흔적을 지우는 일환으로 그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남국의 남녘, 바닷길이 끝나고 대륙으로 건너가는 섬들의 길목에 서귀포 보목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귤꽃 향기 가득하면 그리운 임이 오시는 날이다. 부처님 오시는 날이다.한 30여 년 전에 이곳을 처음 찾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드문 남방의 돔 형태의 사찰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찰에 들어서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참배를 하고 나오니 자그마한 체구의 노스님이 나오셨다. 차담실로 안내를 받고 사찰을 짓게 된 유래를 들을 수 있었다. “절 앞에 보이는 오름 이름을 아시는가. 제지기오름이라고 하지. 절지기에서 변형된 이름이야. 예로부터
지난해 7월 22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왕루신(王쨀新) 주제주중국총영사는 제주와 중국 간에 천년고찰의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1200여 년 전 ‘해상왕 장보고의 발자취를 다시 잇는다’라는 의향서를 체결했다. 해상무역을 통해 한중일과 동아시아를 연결했던 장보고처럼 한·중 관계 진전과 제주지역 경제 활성화 및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물적·인적·문화·역사 교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 자리에 도지사를 비롯해 중국 법화원 스옌쉐 스님, 법화사 도성 스님, 관음사 정안 스님 등이 함께 참석했다.법화사는 제
음력 2월 초가 되면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아득한 바람의 궁전에서 제주를 찾는다. 영등할망은 보름 동안 제주의 땅과 바다에 풍요와 생명의 ‘씨 뿌림’을 한다. 그러면 복수초와 매화를 시작으로 동백·수선화·유채 등 바람의 꽃들은 기운을 차리고 그 향기를 강렬하게 내뿜는다.봄바람이 살랑거려도 아직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기구한 사연을 가슴에 담아둔 씨앗들도 있다. 이번 오등동사지 발굴에 따른 이야기들이 그렇다. 우선 이번에 출토된 자기류 가운데 청자가 많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제주에서 흔치 않은 사례다. 제주불교의 문화 수준을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날 정적을 깨고 뉴스가 들려왔다. 오등동사지 발굴 보고 기자회견 소식이었다. 함께 하는 벗들 탐라유사팀과 현장으로 가보았다. 돌담을 따라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죽성길을 헤집고 갔다. 골프연습장과 개발 중인 공사물들이 가로놓인 길을 비집고 들어선 현장에도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이곳 오등동사지는 예로부터 절왓, 또는 불탄터라고 구전되던 곳이다. 절에서 사용하던 샘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절새미에서는 여전히 다량의 용천수가 흐르고 있었다. 20여 년 전 지표발굴 당시 과수원 일대에서 고려 후기
제석천의 달 토끼가 인간 세상의 바다로 내려왔다. 제주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별방진에 이른다. 그 진성 앞에는 작은 포구가 있고, 그 바다에 토끼섬이 떠 있다. 그 섬에 문주란이 핀다.이 토끼섬은 문주란 자생지인 천연기념물로 7~9월에 흰 꽃이 산형화서로 핀 모습이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이 꽃은 제주도를 비롯해 남쪽으로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어느 태고의 조류를 따라 흐르다 북방한계점에 이르러 터를 잡았다. 꽃만이 아니라 새들은 바람을 타고 사람은 물을 건너와 제주에 터를 잡았
입전수수(入廛垂手),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사슴동산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 속박에서 벗어난 비구들과 함께 전법선언을 하셨다. 영실의 아라한들도 그 가르침을 따랐다. 이은상은 1937년 한라산을 등정하는 그 초입에 아라동 산천단 소림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한라산신제단법당’이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그 건물 안에는 치성광여래와 독수선정나반존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이곳의 유래는 조선 성종 때 ‘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국태민안을 비는 중요한 나랏일의 하나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는 변방이었다. 그러나 한라산은 성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제주에 오는 관료와 양반들은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 기도를 올리고 시문을 한 곡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베이스캠프가 존자암이다. “이 산이 멀리 2000리 아득한 바다 밖에 있으므로 실로 평생 꿈에서도 오지 못하는 곳이오, 오늘 우리의 유람이 어찌 운수소관이 아니겠소?” 판관 김치가 〈유한라산기〉에서 한라산을 등반하기 위해 존자암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밝힌 소회이다. 그는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제주 성을 나섰다. ‘뱀과 같이 요리조리
찬바람이 분다. 숲이 아름다운 길을 열어 놓았다. 무채색 억새의 물결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유채색 화장세계 영실이 나온다. 바위와 나무들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져 세상을 장엄하고 있다. 그곳에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오백아라한이 머무는 아란야 존자암이 있다.홍유손의 ‘존자암개구유인문’에 의하면 “존자암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설 때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는 삼읍(三邑)이 정립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산천 숭배 사상은 일찍부터 발달했다. 더욱이 나말여초에는 산천의
제주의 바람은 일출봉에서 하루를 시작해 산방산에서 일몰을 배경으로 모래와 함께 한바탕 살풀이를 추고서 떠나간다. 그렇게 모래 개울이 흐른다고 하여 산방산 아랫마을을 사계리(沙溪里)라 한다.이런 곳에 어찌 전설이 없겠는가. 옛날 어떤 사냥꾼이 한라산 백록담까지 사냥하러 가게 됐다. 마침 흰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이 흥분하여 활시위를 당겼다. 그런데 흰 사슴은 옥황상제를 모시는 영물이었다. 그 눈빛과 마주친 그의 화살은 목표물을 빗나가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냥에 눈이 먼 사냥꾼이 급한 마음에 만든 큰 사고였다. 생명을
섬은 돌과 바람과 물이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제주는 바람과 돌은 많은데 물이 귀하다. 그러기에 물이 있는 곳에는 옛 절터가 많다. 물이 몸의 생명이라면 믿음은 마음의 생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 흐르는 물을 약수 혹은 죽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 하여 감로수라고 한다.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오름이 시작되는 것구리(꾀꼬리)오름 기슭에 용수량이 제법 되는 샘이 흐르고 있는데 원물(院泉) 또는 절세미(寺泉)이라 한다. 그 이름은 보문사가 있었던 터이기에 붙여진 것이다. 보문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의 〈탐라지〉에
제주시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태고의 정기가 흘러내린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서쪽 줄기는 탐라계곡을 따라 용연과 한두기로 내려오고, 다른 동쪽 줄기는 관음사를 품고 있는 아미봉 줄기를 따라 산천단을 거쳐 산지천으로 흘러 제주항에 이른다. 칠성의 기운을 받은 곳에 옛 탐라인들은 성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까지도 그 지명은 남아 성안의 칠성통을 두고 동문통과 서문통으로 나뉜다. 그곳에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불상 제주민속자료 1, 2호인 동·서자복(미륵)이 제주성의 수난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원진은 〈탐라지(1653)〉에서 ‘만수사는 일
비췻빛 바닷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면 요즘 핫한 제주의 밀라노라 불리는 월정리 마을과 연이어진 행원리 마을이 나온다. 카페가 즐비한 지금과는 달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래바람으로 살기 힘든 곳이었다. 고난이 있는 곳에는 위안하는 이가 있으니, 당에 좌정한 중의 대사다.행원마을 아래 바닷가에는 다섯의 신이 좌정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중의 대사이다. 대사는 강원도 아버지와 철산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의 절이 다 파손되었다.대사는 배를 타고 홀로 제주로 왔다. 옛날 큰 항구였던 압선도(지금의
새벽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따라 시다림을 다녀오니, 절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차담이 시작되자, 누군가 ‘시래’하고 작은 떡 조각을 등 너머로 던지자 몇이 따라 합니다. 그 유래와 의미를 물으니, 모르지만 옛 어른들을 따라서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제주의 목축 농경시대에 옥황상제로부터 오곡 씨를 지상에 가져온 농경신 자청비를 기리는 것입니다. 자청비는 제주에 전승되는 서사무가 ‘세경본풀이’의 주인공입니다. 세경본풀이는 큰 굿에서 연행되는 무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승되는 ‘농경기원신화’로 그 내력을 풀어
어제, 누군가에게로 떠나간 매정한 저녁 해가, 오늘, 나에게로 따뜻한 붉은 여의주가 되어 막막하고 힘든 밤을 지나 희망을 밝힙니다. 안녕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당신을 응원합니다. 누군가에게로 건넨 인사는 평안의 미소가 됩니다. 이 아침, 조금은 긴장된 내게로 위안의 손을 내밀어 희망의 새해 인사를 해옵니다. 이른 새벽, 시린 코끝으로 바람에 한들거리며 다가선 수선화 향을 맡으며 캄캄한 길을 걸어 가까운 오름을 오릅니다. 조금이라도 먼저 마음에 맑고 밝은 기운이 깃들길 바라며 걸어갑니다. 이 어둠을 건너 아침이 오면 자비롭고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