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스님의 편지글을 떠올리며 스님을 기억해 본다. 안타깝게도 스님의 서신을 고이 간직하지 못해 스님께 송구스러울 뿐이다.진철 스님과의 첫 만남은 스님의 법문을 담은 녹음 테이프였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한 기회에 스님을 뵐 수 있었다.시원시원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시대에 필요한 가르침으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녹음테이프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직접 뵙고 가까이서 육성의 법문을 듣고 나니 또 한 번 분에 넘치는 인연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
불자 성원 거사님과 대원성 보살님 전佛恩之下(불은지하)에 원력과 신심으로 雲集(운집)한 성원 거사님을 위시로 家內諸位(가내제위)전에 삼가 합장하여봅니다. 常念(상념) 관세음으로 모든 마장 자취 없고 불일(佛日)이 常照(상조)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거사님 건강 여여하시고 아이들도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고 있겠지요? 전일에는 정말 죄송하였습니다. 생각만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스님을 모시고 수 십 만원을 화주할 마음 때문인지… .바쁘신 가운데 충실히 찾아주신 귀중한 성의를 아랑곳없이 실례를 범했나봅니다. 혹이나 그 정도의 일
불자 대원성 보살 전前生(전생)에 比丘(비구) 比丘尼(비구니)가 원력으로 탄생하셨는지 家內(가내) 식구 모두가 불심에 가득하고 항상 부처님 일이라면 우선으로 하시는 훌륭한 信心(신심)에 이곳 서귀포에서 고개 숙여 합장(合掌)하옵고 지난 번 미국에 계시는 恩師(은사)스님을 위하여 연꽃모임 여러분들의 誠金(성금)으로 부족한 여비를 마련해 드린 데 대하여 그 고마움을 새삼 회상토록 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 아니었더라면 남미 계획을 변경하고 귀국할 정도로 어려웠다 하시며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네” 하시니 이 모두가 대원성보살
근하신년, 癸亥年(계해년) 새해를 맞아 貴(귀) 家庭(가정)에 언제나 健康(건강)과 幸福(행복)이 넘치옵기를 佛前(불전)에 심축하나이다. 불기 2527년 새해 새아침 부산 아란야 절 包月(포월) 慧業(혜업) 합장한 번의 짧은 서신이지만 각별한 서신 중 하나다. 혜업 스님은 일타 스님의 맏상좌로 운허 스님의 강맥을 이었다. 스님은 타고난 지병으로 고생하시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스승보다 먼저 원적에 든 스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거워진다. 스님과 주고받은 서신이 많지는 않지만 가슴 속엔 많은 추억이 있다.1980년쯤이었
가을입니다. 집 짓느라 수고 많으시지요? 저는 요즘 바쁜 일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언젠가 부탁했던 법회의 일, 이 가을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군요. 널리 양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9월 10월 11월까지 예정된 일로 꽉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거사님께도 문안 사뢰어 주십시오. 대원성 큰소리 가끔 들려옵니다.1984년 9월 13일 불일암에서 합장맑게 개인 가을날입니다. 모임의 날짜를 11월 21일(수요일) 오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시민회관 같은 데는 절대 불가하고 따로 돈 들일 것 없이
연꽃모임 껍데기들 동반한다니 잘 한 일입니다. 대원성 체면을 생각하더라도 어디 안 나가고 있어야겠지요. 봄이라서 집 비우고 어지간히 돌아다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한테도 선량한 거사님한테도 신경을 쓸 줄 믿습니다. 요즘 우리 불일의 뜰에는 매화가 활짝 피어 은은한 꽃향기를 발하고 축대 밑에서도 수선이 쏙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비가 좀 왔으면 좋겠는데 봄 가뭄이 너무 심합니다. 그럼 산에서 만날 때까지 더욱 더 예뻐지십시오. 목소리도 좀 톤을 낮게 하고요.- 4월 14일 불일암에서 합장 오늘 引路王(인로
사진과 사연 기쁘게 받았습니다. 사진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간판 내 걸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채소밭에서는 상치와 아욱이 잔뜩 자라 오르는데 혼자서는 다 뜯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데 살면 좀 뜯어갔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도 없군요. 이제 여름 냄새가 후끈거립니다. 오늘은 발을 꺼내 걸었습니다. 요즘 저녁으로는 국수를 삶아 먹고 있는데 콩 담가 놓은 게 있어 오늘 저녁은 밥을 해 먹어야겠습니다. 지난봄에 와서 고성능 스피커로 떠들던 소리 아직도 우리 불일의 뜰에 맴돌고 있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이루십시오. 6
대원성 양주에게1월 4일 편지 잘 받았습니다. 성원 처사님도 함께 편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아기를 낳았다하니 반갑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고 生이 있으면 死가 있듯이 결혼을 하면 반드시 자식을 낳아야만이 常道(상도)이지 만일 아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제대로 되는 길이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아무쪼록 二身同志(이신동지)가 되어 단란한 가정을 이룩하며 현모양처가 되도록 바랍니다. 이곳은 如前(여전)하며 일타 스님은 극락전에 편안히 계시며 나도 잘 있습니다. 이젠 옛날 수련대회를 다닐 때와는 각도가 다를 것입니다.부산
대원성에게16일 편지 잘 받았습니다. 진주 강화 등지로 다니면서 오랜 기간에 정성껏 기도하였다니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무한한 힘을 가졌지만 무명의 먹구름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힘을 빌리지 않으면 모두가 뜻대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들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곳은 별일 없으며 종정스님도 편안하십니다. 아무쪼록 부처님의 품안 광명속에 살면서 보람된 삶을 가지길 바랍니다. 언제 기회 있으면 한번 오길 바랍니다. 나도 부산 가는 길 있으면 한번 갈까 합니다. 진포 2동 항도
보내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盧 處士님과 아이들도 모두 편안하길 바랍니다. 이젠 벌써 가을기분이 도는 듯합니다. 옛 시구에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미각지당춘초몽 계전오엽이추성), 즉 이른 봄 연못가의 풀은 아직 동면의 꿈도 제대로 깨지 않았는데 뜰 앞의 오동나무는 이미 가을 소식을 전해준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諸行無常(제행무상)일뿐 만 아니라 生 卽 死입니다.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팔, 구십을 산다 해도 죽음의 사이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봄이 곧 가을인 것과 같이 生이 곧 死입니다. 이 얼마나
〈서신 1〉대원성께옥서(玉書)와 사진 잘 받았습니다. 사진 솜씨와 재조가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남녀 간에 못나고 평범해야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테이프가 이상이 있는 것은 전부 가져오시면 꾸짖고 나무라고 해서 작품을 더 잘 만들도록 하고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충고는 귀에 담았습니다.회원들께 안부 사뢰시고 건강하시길 비나이다. 이곳은 유월의 연하(煙霞) 속에 매미소리가 한창입니다.〈서신 2〉대원성께옥서(玉書) 잘 수견(受見)했습니다. 귀한 분들이 오시니 산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성전암 주.철웅 스님이 대구 파계사
南無妙法蓮華經뻗어나는 신록의 6월. 내외분 건강하오며 아기도 충실하다 하오니 무엇보다도 축하합니다. 전일에는 공자양이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하시여 병환 시중을 정성으로 하더군요. 그리고 결혼할 배우자를 모시고 와서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갔지요. 언제 약혼 또는 결혼식을 올리는지요? 지난 14일 배능자(묘찬 스님 소개) 양이 상경하였다가 19일 부산 자택으로 돌아갔지요. 마침 15일부터 80명의 신도승속이 설악산 신흥사 계조암 비선대 와선대 낙산사 강릉 경포대 오죽헌 월정사 상원사 중사자암 적멸보궁(불사리를 모신 곳) 등을
寂滅無性不可取, 善住山房 石鼎 漏 李大圓性 佛子석정 스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으로서 한 시대 최고의 불모였다. 위의 글은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주신 글이다. 스님은 생전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셨기 때문에 나는 스님을 자주 뵐 수 있었다. 특히 일타 스님, 지관 스님, 법정 스님께서 오실 때면 석정 스님이 계셨던 선주산방에서 함께 뵙는 일이 많았고, 종종 집으로 모셔 공양을 올리기도 했었다.어느 해, 우리 집 마당에 표주박이 열렸는데 일타 스님과 석정 스님이 오셔서 작은 박에 글과 그림을 주시고 가셨다.
1967년 11월 18일 부산 대각사 청년회 수련대회 때 스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 스님이 우리 담당 스님이었다. 스님은 우리에게 절에서 지켜야 할 예법과 2박 3일 동안의 수련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저녁예불과 법문 후 스님은 잣을 가지고 우리가 묵고 있던 홍제암으로 오셨다. 스님께서는 잣을 하나하나 일일이 까주셨고, 우리는 서로 잣을 주워 먹겠다고 용을 썼다. 잣 하나에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었다. 스님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시면서 “그래도 밤 9시에는 무조건 취침에 들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스님께서
경봉 스님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통도사 극락암에 계셨기 때문에 따로 서신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여쭐 것이 있거나 들을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찾아뵈었다. 서신은 아니지만 서신처럼 생각하며 받은 것이 있다. 어느 날, 유묵을 한 점 주셨는데, 주신 말씀은 ‘무가애(無핯碍)’였다.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당부하셨다.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가슴에 품어야 할 공부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글이었지만 스님의 글씨로 받고나니 새삼 무겁고 경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실천의 의지가 전에 없이 새
〈서신 1〉격조망각의 직전에 다시 거각함은 항신의 법칙이라 했는데 답이 늦다 책망은 아니 했겠지. 아버님과 더불어 집안 두루두루 무양호아 이곳 산색은 불이문하고 천승은 상도이 한데, 송풍이 폭염을 가리워 복중 무고하나 대학생 수련대회 160여 명 때문에 조금은 씨름판입니다.수놓을 붓글씨는 죽어라하고 연습 중이니 10년 안에는 꼭 써줄 테다. 성급하게 쓰면 졸작이라 못쓴단다. 부디 여유와 지족과 심사의 미덕으로 영원한 행복 도모할 것을 빌고 바라고 원하며 방석 받고 안좌하여 일찍 답서하노라. 중추절 가야산 퇴설(눈무더기)그 해에 손뜨
대원성 보살아. 세상사리 자미 있는지? 만사(萬事)가 무비몽중(無非夢中)인데 그저 그 말 할 테지. 꼬마들 충실하고 아빠 처사도 度世攝心(도세섭심)에 불자의 긍지를 잃지 않고 지내는지? 떠나기 전에 부산가면 꼭 한 번 가 보아야지. 꼬마 木鐸(목탁) 희자가 빨리 안 보낸다고 극성 하는 바람에 나도 大木(대목)에게 빨리 야단쳐서 칠도 안하고 보내니 농방 같은 데 가서 칠을 하면 예뿔게다. 자 해제하고 나가면 들리기로 하고 이만 안녕. 관음보살.1972년 여름, 내가 결혼한 후 처음 일타 스님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오시기 전
내게 묻노라 어찌하여 碧山(벽산)에 사느냐고,웃을 뿐 답하지 않노라마음은 스스로 平安(평안)하니 산은 깊고 물은 흐르고각색 초목은 휘어져 있고 이상한 새소리는 사방에 울고적적하여 세상 사람은 오지 않는데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하니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인가별이 고와 꽃들이 아름답듯 집안에 꼬마들 함께 즐거움 가득하려니일심청정 호지로 언제나 부처님 광명이 충만하기를희자는 요즘도 자주 오는지시절 인연에 미루고 이만 줄이며 부디 몸소 튼튼. 태백산 도솔암에서 수행 중이실 때 쓰신 글을 보내셨다. 희자 스님은
설적산중(雪積山中)이라 일체왕래(一切往來)가 절(絶)한 곳. 한 달 만에 좁쌀 팔러 下山했던 자명이가 한 아름 찾아 온 편지와 소포, 그리고 소포 속에 또 접은 소식, 산중 사람 반가움을 한껏 더해 주었다네. 애기 하나 더 낳았다고? 우선 명과 복을 빌지만 이젠 고만 낳고 몸을 생각하도록. 내가 인디아에 갔을 적에 벽보판을 보니 아빠와 엄마 그려놓고 딸 아들 하나씩 밑에 그려 가족계획 전단을 붙여 놓았는데 사람들이 옆에다 꼬마 하나씩 더 그려 낙서 해 놓았더군. 곳곳마다 많이 낳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골병드는 거 아닌지?
대원성 보살아,불법에 숙세선근이 깊은지라 신심의 소생이 아님이 없으니, 그 아니 죄멸복생(罪滅福生)이며 복지심령이 아니겠는가. 그 옛날 극락전 별당에 몰려왔을 적에는 더 놀지 못하게 쫓아버렸던 것이 걸렸었지만 지금은 여기 암자에 집수리도 거의 끝나가고 객실도 마련되었으니 언제라도 처사와 같이 와서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집수리가 끝나고 나도 시간을 지킬 셈이고 번산 청장 외에는 나가지 않을 작정이니 남은 해를 손해 없이 지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처사가 전근이라니 상관없는지? 모쪼록 일심청정 더욱 보중하기를 빌며 내내 부처님 광명